진이 가진 아이러니



진지하지 않아서 결국 진지해질 수 있는 사람, 진이 가진 아이러니.

스케줄이 없는 진의 하루는 대략 이렇다. 새벽 5시까지 실컷 게임을 하다 잠이 들고 오후 2시 즈음 일어난다. 침대에 누워 3시간가량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끔 휴대폰을 체크하고 TV도 한 번 켜본다. 또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허기가 지면 무언가를 먹는다. 배가 부르니 나른해지고 자연히 침대로 간다. 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군가 너 좀 한심하게 살았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잉여로운’ 하루다. “어제 그렇게 보냈어요.” 2021 BTS 페스타(FESTA) ‘아미 만물상점’에서 말했듯 진에게는 하루를 얼마나 한심하게 보냈는지가 자신을 만족시키는 기준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온전한 자유를 즐기는 날이 어제였다면, 오늘 <보그> 촬영은 정반대다. “간만에 역대급 스케줄이었어요. 어제 TV 본 다음 2시간 정도 더 누워 있다가 5시간 게임하고 새벽 2~3시쯤 잠들었나? 그리고 여기 온 거예요. 오늘은 보상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는 아마 스케줄이 끝난 후에 게임을 하거나 정말 친한 친구들 한둘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양껏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내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부를 만큼 마냥 즉흥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자신만의 규칙이 분명한 사람이다. 휴식에 대한 소신만 봐도 그렇다. “요즘에는 휴식이라는 말이 변질된 것 같아요. 휴식이라는 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여가 시간마저 스펙 쌓기라고 해야 하나,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무쓸모의 쓸모를 믿는 사람이에요. 남들이 보기엔 쓸모없는 하루가 있어야 쓸모 있는 일에도 더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러니하게도 진은 ‘잉여로운’ 시간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일상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다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 같은 거죠(웃음).”

말해두자면, 이 인터뷰는 진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읽어야 한다. 어떤 내용이든 지금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천진한 톤,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확신에 찬 말투, 사이사이 일명 ‘유리 닦는 소리’라 불리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섞어가면서 말이다. 인터뷰 내내 대체로 농담이 오갔다. 그의 농담에는 특이한 구석이 있는데, 바로 이면이 없다는 점이다. 보통 농담만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그렇듯 진심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처럼 느껴지는 게 아니라 적당히 무덤덤하고 발랄하며, 적당히 진심으로 들린다. “저야 꽃미남이죠. 이런 건 빼지 않습니다”와 “음… 제 일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어요”를 같은 톤으로 이야기하는 식이다.

“진지한 분위기를 싫어해요. 자칫 그런 분위기가 형성될 때면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하죠.” 우리는 이미 수많은 프로그램, 콘텐츠에서 창의적인 유머, 진이 사랑하는 ‘아재 개그’를 봐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에서 에너지를 얻는 이 남자는 무대 위를 제외하고 진지해지는 순간이 있느냐는 질문에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답했다. “정말 없어요(웃음). 보통 진지한 사람과 가벼운 사람이 대화를 나누다 보면 둘 중 하나가 끌려가기 마련이거든요. 결국은 심각한 분위기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저는 안 그래요. 저희 회사에 세상 진지한 분이 계신데, 그 실장님과 대화할 때도 30분 중 20분은 농담을 하다 나와요. 만약 이 사람은 너무 진지해서 나와 맞지 않을 것 같다 싶으면 자리를 빨리 피하고요.”

그래서 우리는 마주 앉아 주어진 시간에 맞춰 개인의 고뇌와 불안, 미래를 멋들어지게 논하는 대신 더없이 가볍고 유쾌하며 조금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택했다. 왜 이토록 진지한 분위기를 꺼리냐고 슬쩍 물으면 진은 “재미없으니까요(웃음)”라거나 “인터뷰할 때나 친구들과 대화할 때나 똑같아요” 같은 격의 없는 답을 내놓았다. “본업은 가수지만 제 일의 경계선이 굉장히 모호하잖아요. 무대도 해야 하고 오늘처럼 화보도 찍어야 하고 콘텐츠 촬영도 있고요. 일 자체에서는 당연히 진지하죠. 하지만 제 일의 경계선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구체적으로 ‘언제 진지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무대 위를 제외하고는 80~90%는 거의 장난을 치면서 보내니까요.”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무용해 보이는 가벼움은 결과적으로 유용하게 작용했다.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게 제가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동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진이 말하는 ‘재미’에 대한 철학은 방탄소년단을 유일무이한 슈퍼스타로 만든 요인 중 하나다. 방탄소년단에겐 여느 슈퍼스타와는 차별화된 친근함이 있다. 우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것 같은 머나먼 히어로적 존재가 아니라 나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다. 음악에서는 물론 예능 프로그램이나 인터뷰에서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와 여전히 실없는 장난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8년 전 데뷔 초반의 그것과 비슷한 공감을 느낀다. (스케일은 커졌으니 감동은 몇 배다.) 이런 방탄소년단의 독보적인 케미에서 진의 역할은 크다. 그는 팀 내 가장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동생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동시에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아주는 가장 이상적인 ‘맏내(막내 같은 맏형)’로 꼽힌다. 세상 걱정 없는 태도로 어떤 상황이든 산뜻하게 중화시키는 진의 능력은 방탄소년단이 가진 인간적인 매력의 주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진은 내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 저는 굉장히 별 볼 일 없고 뭐 하나 뛰어나게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에요. 주변에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제가 이 말을 꺼내기만 해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너는 엄청난 뭔가를 해냈다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아직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누군가 저한테 남들보다 무엇이 잘났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방탄소년단이야’ 말고는 크게 할 이야기가 없어요.”

정말로, 여전히 그럴까? 방탄소년단의 업적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보그> 지면이 부족할 정도인 지금도? 아무리 진이 저렇게 강조한다고 해도 우리는 매번 반문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어쨌거나 진은 솔직하다. 지금 그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필터링 없이 툭툭 털어놓는다. 전 세계 어딜 가든 ‘월드와이드 핸섬’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도, 반면에 인터뷰에서 대수롭지 않게 반전 속내를 비친다는 것 모두 높은 자존감의 증거다. “사실 저보다 잘생긴 분들 많잖아요. ‘월드와이드 핸섬’은 남들 웃으라고 가볍게 던지는 말이에요(웃음). 저보다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다만 다른 사람들이 실제의 저보다 저를 더 좋게 봐주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솔직함은 건강한 자기애의 동력이 되고 결국 꾸밈없는 긍정으로 치환된다. “누구나 타고난 분야라는 게 있잖아요.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힘들 때 금방 잊어버리는 게 제 능력인 것 같아요.” 그의 긍정에는 특별한 비법은 없었지만 분명한 해답은 있었다. “음… 일상에 충실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데뷔 초반 진은 말수가 적은 멤버였다. ‘냉미남’ ‘얼음 왕자’ 이미지였던 그가 2016년 발표한 앨범 <화양연화 Young Forever>의 타이틀곡 ‘불타오르네’의 가사 “니 멋대로 살어, 어차피 니 꺼야, 애쓰지 좀 말어, 져도 괜찮아”에 자극을 받은 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어차피 좋아할 사람들은 좋아하고 싫어할 사람들은 싫어한다’는 유명세의 세금 같은 진리를 깨달았다는 거다. “예전에는 방탄소년단의 진과 사람 김석진을 어느 정도 구분해두었는데, 이제는 안 그래요. 그냥 방송에서 하는 대로 현실에서도 사는 것 같아요.” 과거의 모습을 보면서 진은 ‘왜 저렇게 살았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분명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이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누군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전 세계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는 2020년부터 세웠던 목표를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다. 바로 ‘생각 없이 살기’다. “결코 쉽지 않은 목표이긴 해요. 잡생각이 정말 많이 들잖아요. 내일은 이걸 해야 하고, 내일모레에는 다른 일이 있고… 본래 성향 자체가 계획하는 걸 싫어해요. 계획은 일단 지켜야 하는데, 그게 힘들어서 여행이든 뭐든 즉흥적으로 하는 편이죠. 인생의 큰 틀 정도는 세우는 게 맞겠지만 세부적인 계획은 좀 피하고 있어요. 머리 아프니까요(웃음).” 진은 마지막까지 농담 같은 말투로 명쾌하게 말했다. “생각 없이 살아서 요즘 좀 더 행복하지 않나 싶습니다.”




포토그래퍼 장덕화
글 권민지
패션 에디터 허보연
헤어 한솜(빗앤붓)
메이크업 김다름
세트 다락(Da;rak)
일러스트레이션 Alvin Tran
스타일리스트 이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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